바람이 가는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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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만나야한다.

무심한 세월은 흐르고 또 흘러갔다. 정부에서 주선한 남북 이산가족 상봉이 몇 차례 이루어졌지만 아버지와 아들을 만날 수는 없었다. 매들은 국경을 지우며 가을이 깊어지면 돌아오고 봄이 찾아오면 북으로 돌아가기를 반복했다. 새로운 기계시설을 갖춘 방앗간이 늘어나면서 도르메물레방앗간도 과거로 사라졌다. 처남 송훈이는 방앗간을 그만두자 시간이 많이 남는다며 매사냥을 자주 나갔다. 열심히 하는 만큼 재미도 지고 백운에 매사냥 수준이 높다는 소문이 퍼지자 여기저기서 매사냥을 배우려는 사람들이 찾아왔다. 우리는 예전부터 하던 놀이이고 좋아서 하는 일이었지만 민중생활사 연구소라는 곳에서 백운의 매사냥을 연구하겠다며 찾아왔다. 연구원들은 우리가 알지 못하는 매사냥의 역사까지 알아내 두터운 책을 만들었다. 계절은 돌고 돌..

사람의 기억 2023.12.11

매사냥은 방앗간집 처남에게로 이어지고

다시 겨울이 찾아왔고 매가 돌아왔다. 딸아이들은 다들 시집을 가서 도시로 나갔다. 먹고 살 길이 막막해서 도시로 떠나는 사람들이 많았지만 도시로 떠나는 것이 유행처럼 번져서 도시로 나가지 않으면 바보취급을 받기도 했다. 산골마을에 남은 사람들은 늙고 노회한 사람들이거나 늙은 부모를 봉양해야하는 무녀리들이었다. 도시로 나간 이들은 잘 살 거라 생각했지만 산골마을에서 쌀을 가져갔고 무녀리들은 소를 팔아 도시에 사는 동생들에게 돈을 보냈다. 도시는 눈뜨고 코를 베어가는 세상이었고 숨만 쉬어도 돈이 든다고 했다. 산골에 사는 무녀리들은 무녀리의 역할을 잘 해냈다. 일하는 소가 먼저 사라졌는지 경운기가 먼저 들어왔는지는 모르겠지만 논과 밭에서는 시끄럽게 딸딸거리는 경운기가 주인행세를 했다. 한 식구로 살아가던 소..

사람의 기억 2023.12.10

개마고원으로 떠나는 할아버지, 오랜 이별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판단은 빨랐다. 며칠 동안 좋은 음식과 약으로 기력을 찾은 할아버지는 14년 전 그 날처럼 먼 길 떠날 채비를 서두르셨다. 아버지는 집안에 있는 패물들을 모조리 모아서 무명 주머니에 담았다. 배가 불러오기 시작한 며느리에게도 길 떠날 채비를 하게 했다. 할아버지께서는 북한에 새로운 가족이 있다 하셨다. 독립운동을 함께했던 동지와 결혼을 해서 아들이 둘이라 했다. 나에게는 작은 아버지가 생겼고 아버지에게는 동생이 생겼다. 할아버지께서는 갖은 세상풍파를 다 겪었을 터인데도 50대 중반으로 보기에는 너무 젊고 건강해보였다. 상처에 대한 회복력도 빨라서 일주일이 지나지 않아 관통상을 입은 옆구리가 깨끗이 나았다. 보름달이 덕태산 너머에서 올라왔다. 임포수가 징병과 징용으로, 위안부로 사람들을..

사람의 기억 2023.12.09

한국전쟁이 발발하고 임포수와 할아버지가 돌아왔다.

그러던 어느 날 전쟁이 났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전쟁이 일어났다고는 하지만 산골마을에는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아침에 눈을 뜨면 밭을 갈러 나가고 저녁이 되면 괭이를 메고 집으로 돌아오는 평화로운 일상은 계속되었다. 국군이 인민군에게 밀려 부산까지 내려갔다는 소식이 들렸고 미국이라는 나라가 전쟁에 개입해서 압록강까지 밀고 올라갔다는 소식이 들렸다. 다시 중국군이 들어와 서울을 빼앗겼다는 소식이 들렸고 소련군까지 끼어들어 전쟁은 중국과 러시아와 미국이 하는 전쟁이 되었고 국군은 총알받이로 쓰인다는 소문이 돌았다. 아들을 외국 군인들이 벌이는 전쟁에 희생양으로 보내기 싫었던 아버지는 갓 열아홉 살이 된 나를 외할아버지 동네로 장가를 보냈다. 아버지께서는 나에게 처가에 가서 일 년 정도 일을 해주고 돌아오라 ..

사람의 기억 2023.12.08

광복을 맞이하고 동물들은 돌아왔지만 할아버지와 임포수는 돌아오지않았다.

지난 겨울 눈은 무지막지했다. 무언가 꼭 지워야 할 것이 있는 모양이었다. 무언가 꼭 덮어주어야 할 것처럼 겨울 내내 산들은 두꺼운 눈으로 덮여 있었다. 눈이 너무 깊어 붉은 눈의 사냥꾼들도 산에 들어가지 못했다. 작은 들짐승들은 마을로 내려와 먹을 것을 구걸했고 얼마 남지 않은 호랑이와 사슴과 늑대들은 더 깊고 더 높고 더 쓸쓸한 곳으로 올라갔다. 오는 봄을 막을 수는 없어 깊고 두껍게 쌓였던 눈들이 한꺼번에 녹아내렸다. 비가 오지 않았지만 계곡물은 큰 소리를 내며 흘렀다. 산속에 버려진 호랑이와 늑대들의 시체들도 씻겨 내려갔다. 내동산 금광에서는 금 생산량이 현저하게 줄었다. 금이 많이 나던 시절만을 기억하는 붉은 눈의 사람들은 수맥을 터뜨리기 전으로 돌아가고 싶었지만 땅 속에 있는 길을 찾기는 그렇..

사람의 기억 2023.12.07

검은독수리와 만주로 떠나는 할아버지

아버지는 오래 전부터 젊은 할아버지께서 큰일을 하러 떠나시리라는 것을 어렴풋이 느끼고 있었다. 아직 어린 아버지에게 매사냥을 가르치실 때도 그랬고 이유야 그럴 듯 했지만 혼례를 서두르실 때도 그랬다. 매일같이 서당에 들러 선생님과 바둑을 두고 중국어와 러시아어를 배울 때도 그랬고 임포수를 피신시키고 임포수 식솔들을 거둬들일 때도 그랬다. 아버지는 임포수댁을 시켜 그동안 모아놓은 토끼가죽으로 두툼한 조끼와 모자를 만들게 했다. 두엄자리에 묻어두었던 사금을 꺼내 작은 주머니 여러 개에 나누어 담았다. 티끌 하나도 남기지 않고 모조리 담았다. 나귀에게는 물과 먹이를 충분히 먹이고 먼 길 떠날 채비를 하게 했다. 눈이 내렸다. 세상의 모든 길들은 지워졌다. 많은 눈이 내렸고 잠시 눈은 그쳤지만 하늘은 언제라도 ..

사람의 기억 2023.12.06

검은 독수리와 할아버지의 결심

참혹한 일들은 세월이 흐를수록 더 자주 더 많이 일어났다. 괴물들은 빼앗을 것들이 줄어들자 화를 달고 살았다. 빼앗을 것이 줄어든 이유가 자기 동료들 때문이라 생각한 괴물들은 지들끼리 물어뜯으며 싸웠다. 산에는 호랑이도 늑대도 여우도 다 사라졌다. 죽임을 당하고 껍질이 벗겨지고 살덩이는 버려졌다. 죽음에 대한 예의는 버려진지 오래였고 인간들과 어울려 살아가며 균형을 조화를 바라던 짐승들은 사람의 손이 닿을 수 없는 깊은 숲으로 몸을 감추었다. 그렇게 몇 해가 지나고 다시 겨울이 왔다. 그동안 나도 많이 커서 나귀를 혼자 타고 내리고 할 수 있게 되었다.해마다 돌아오던 매들도 다시 돌아왔고 여전히 할아버지와 아버지는 나를 데리고 매사냥을 나갔다. 사냥에 나가면 매들은 단 한번 날아올라 한참동안 세상을 살펴..

사람의 기억 2023.12.04

장터 국밥집 가마솥에는 이야기도 끓고있었다.

가을걷이가 끝나갈 무렵 까마귀 떼가 지나가고 매가 돌아왔다. 때가 되면 돌아가고 싶은 고향집처럼 이름표를 달고 북으로 올라갔던 매들이 다시 고향집으로 날아들었다. 다시 돌아온 매는 작년보다 우람해졌고 가슴 털은 색깔이 더 진해지고 풍성해졌다. 해마다 집으로 돌아오는 매라면 수진이(새끼 때부터 집에서 키운 매로 사람을 잘 따르고 야생으로 돌아갈 염려가 없다. 사람의 손을 많이 타서 야생성이 좀 떨어지고 그만큼 사냥능력도 해마다 길들이는 매에 비해 조금 떨어진다.)라 불러도 될 만큼 우리 가족과 한 식구가 되었다. 이제는 매를 답답한 매방에 들이지 않아도 되겠다. 할아버지께서는 닭과 비둘기가 사는 우리 한 칸을 막아서 매가 사는 집으로 만들었다. 그렇게 또 한 해가 지나고 할아버지께서는 내가 두 돌이 되던 ..

사람의 기억 2023.12.03

독립운동자금과 마을을 위해 내놓은 송아지와 당나귀

외할아버지께서는 7일이 지난 다음 장에 다슬기 한 말을 팔러 나가셨다. 모가지에 끈이 묶인 항아리 두 개에 반말씩 나누어 담았다. 나귀는 다슬기 한 말을 가볍게 등에 메고 콧노래를 부르며 꽃향기 그윽한 오솔길을 걸어간다. 외할아버지는 장터에 도착하자마자 어두운 다갈색 다슬기 한 말을 낯빛이 다슬기보다 더 어두운 다갈색인 일본 순사에게 비싼 값에 팔았다. 도르메방앗간 일꾼들 열 두 명이 일주일간 주운 누런 다슬기는 얼마 만큼인지 아무도 모른다. 방앗간 일꾼들은 외할아버지를 생명의 은인으로 믿고 따랐고 흰구름 마을에서 금은 일본 놈들과 괴물들 말고는 거래가 불가능했다. 금은 일본인이 독점해야하는 물건이었고 조선인이 가지고 있는 것은 범죄에 해당하는 것이었다. 외할아버지는 금을 팔아서 돈을 벌 생각이 애당초 ..

사람의 기억 2023.12.01

외할아버지의 백일선물 사금을 채취하게 된 사연

젊은 할아버지는 백일 된 할아버지를 안고 외할아버지를 반기신다. 마당과 사랑방과 대청마루에서는 평범하지만 맛있는 음식들로 상이 차려졌다. 백일잔치를 핑계로 일하는 사람들을 배불리 먹이려는 할아버지의 뜻이다. 할아버지의 뜻을 잘 아는 동네 사람들은 고맙고 맛있게 음식을 먹으면서 나의 백일을 축복해주었고 겉치레를 싫어하는 할아버지의 성정을 잘 아는 집안 어른들과 외할아버지 식구들도 만족해하며 잔칫상을 즐겼다. 외할아버지는 젊은 할아버지께 특별한 선물을 가지고 오셨다. 외할아버지께서는 촘촘하게 짠 무명천으로 만든 묵직한 자루를 하나 건네신다. 묵직한 자루의 사연은 이러했다. 내동산 금광에 금맥이 터져서 일본 놈들이 난리가 났다. 순도가 높고 굵직한 금맥이었다. 순도가 너무 높아서 가공을 할 필요도 없었다. 금..

사람의 기억 2023.1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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