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이 가는 길

사람의 기억

검은 독수리와 할아버지의 결심

솔바위 2023. 12. 4. 15: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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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혹한 일들은 세월이 흐를수록 더 자주 더 많이 일어났다. 괴물들은 빼앗을 것들이 줄어들자 화를 달고 살았다. 빼앗을 것이 줄어든 이유가 자기 동료들 때문이라 생각한 괴물들은 지들끼리 물어뜯으며 싸웠다. 산에는 호랑이도 늑대도 여우도 다 사라졌다. 죽임을 당하고 껍질이 벗겨지고 살덩이는 버려졌다. 죽음에 대한 예의는 버려진지 오래였고 인간들과 어울려 살아가며 균형을 조화를 바라던 짐승들은 사람의 손이 닿을 수 없는 깊은 숲으로 몸을 감추었다. 그렇게 몇 해가 지나고 다시 겨울이 왔다. 그동안 나도 많이 커서 나귀를 혼자 타고 내리고 할 수 있게 되었다.해마다 돌아오던 매들도 다시 돌아왔고 여전히 할아버지와 아버지는 나를 데리고 매사냥을 나갔다. 사냥에 나가면 매들은 단 한번 날아올라 한참동안 세상을 살펴보다가 내려앉았다. 사냥감을 잡건 잡지 않건 단 한 번의 비행으로 그만이었다. 할아버지와 아버지는 내 안에 세상을 품는 방법을, 세상을 올바르게 바라보는 방법을 몸소 보여주시려 했다. 우리가 품어야할 세상이 균형과 조화를 이룬 따뜻한 세상이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매를 날렸다. 사냥을 마치고 집에 돌아와 매를 쉬게 하려고 매장으로 들어서려는데 열어둔 문으로 먼저 들어와 매들이 먹다 남긴 비둘기를 먹고 있던 검은독수리가 아는 채를 한다. 사람에 대한 경계심이 매보다 훨씬 심한 녀석을 곁에서 볼 수 있다니 신기한 일이다. 할아버지께서는 무슨 사연이 있겠다 싶어 매들은 매방으로 들이고 매장 문을 살며시 닫았다. 문을 닫는 서슬에 검은독수리가 날개를 편다. 날개를 편 검은독수리는 송아지보다 크다. 만주와 몽골에서는 검은독수리를 어려서부터 길들여 매사냥에 쓴다고 들었지만 겨울을 나고 다시 고향으로 돌아가는 검은독수리는 조선땅에서는 번식을 하지 않아 독수리를 길들이기는 불가능하다. 그런데 이 녀석은 좀 수상하다. 검은독수리들은 매보다 높은 곳을 날고 그만큼의 경계심으로 사람이건 날짐승이건 곁을 주지 않는다. 사람이 사는 마을에서 멀리 떨어져 높은 하늘을 지배하며 살던 검은독수리가 사람이 사는 마을에 나타나는 것도 특별한 일인데 더군다나 울타리 안으로 들어와 먹이를 먹고 있는 것은 분명 무슨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 이유가 아무리 궁금해도 섣불리 움직이면 안 된다. 매와의 교감을 이룰 때처럼 조심스럽게 다가 가야한다. 검은독수리는 북만주 어디메에서 살다가 겨울을 나러 왔을 터이고 그만큼 먼 거리가 있었으니 거리를 좁히는 데는 조심스러운 시간이 필요하다. 다행히 검은독수리가 먼저 문을 두드렸으니 교감을 이루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을 것이다. 할아버지께서는 독수리가 나타난 날부터는 하루 종일 독수리 곁을 떠나지 않으셨다. 먹이를 주고는 그 앞을 쉬지 않고 천천히 걸으셨다. 며칠을 그렇게 서성이시던 할아버지께서 버렁(목이 긴 가죽장갑)을 끼고 두꺼운 조끼를 입으시고는 독수리에게로 다가갔다. 독수리는 흙먼지를 일으키며 날아올라 할아버지 어깨위에 내려앉았다. 독수리는 고개를 돌려 할아버지를 바라본다. 왜 이제야 들어왔느냐는 눈치다. 할아버지께서는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누군가가 길들여 키우던 독수리였다는 것을! 할아버지는 독수리를 어깨에 올린 채로 매장을 나와 나귀에게로 갔다. 나귀등에 안장을 얹으니 독수리는 안장 앞쪽에 내려앉는다. 할아버지는 나귀등에 올라 매사냥을 하던 뒷동산에 올랐다. 할아버지는 묵직한 독수리를 팔뚝에 올리고는 하늘로 힘껏 밀어 올렸다. 독수리는 몸이 무거워 비행을 시작할 때 에너지가 많이 필요한데 할아버지께서는 그 힘을 대신 써주셨다. 할아버지는 검은독수리가 높은 하늘로 날아올라 바람을 타고 타원을 그리며 도는 순간 광활한 벌판을 보았다. 광활한 벌판은 할아버지의 심장을 뛰게 하는 무언가가 있었다. 그날 저녁 할아버지께서는 아버지와 저녁을 드시면서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 어려운 결심을 쉽게 꺼내셨다. 잠깐 만주에 다녀오시겠다는 말씀이셨다. 몇 년이 걸릴지 모르겠지만 꼭 돌아오시겠다는 말씀이셨다. 아버지는 오래전부터 미리 알고 계셨던 것처럼 놀라지 않으셨다. 아버지는 할아버지께 건강하게 꼭 돌아오셔야 한다는 말씀만 몇 번 되풀이 하셨다. 밖에는 바람이 세차게 불어 창호지가 파르르 떨렸고 세상의 모든 길을 지우려는 듯 굵은 눈이 눈물처럼 쏟아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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