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이 가는 길

사람의 기억

광복을 맞이하고 동물들은 돌아왔지만 할아버지와 임포수는 돌아오지않았다.

솔바위 2023. 12. 7. 18: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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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겨울 눈은 무지막지했다. 무언가 꼭 지워야 할 것이 있는 모양이었다. 무언가 꼭 덮어주어야 할 것처럼 겨울 내내 산들은 두꺼운 눈으로 덮여 있었다. 눈이 너무 깊어 붉은 눈의 사냥꾼들도 산에 들어가지 못했다. 작은 들짐승들은 마을로 내려와 먹을 것을 구걸했고 얼마 남지 않은 호랑이와 사슴과 늑대들은 더 깊고 더 높고 더 쓸쓸한 곳으로 올라갔다. 오는 봄을 막을 수는 없어 깊고 두껍게 쌓였던 눈들이 한꺼번에 녹아내렸다. 비가 오지 않았지만 계곡물은 큰 소리를 내며 흘렀다. 산속에 버려진 호랑이와 늑대들의 시체들도 씻겨 내려갔다.

  내동산 금광에서는 금 생산량이 현저하게 줄었다. 금이 많이 나던 시절만을 기억하는 붉은 눈의 사람들은 수맥을 터뜨리기 전으로 돌아가고 싶었지만 땅 속에 있는 길을 찾기는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었다. 붉은 눈의 사람들은 작은 금은 금이 아니었고 금덩어리를 보지 못하게 된 일본인 금광전문가들은 하나 둘 떠났고 대신 사금이 난다는 소문을 듣고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백운 장터는 일확천금을 바라는 사람들로 북적였고 국밥집은 가마솥 하나를 늘려야 할 정도로 장사가 잘 되었다. 금광을 운영하던 붉은 눈의 사람들은 금이 줄어들자 부수적으로 얻어지던 철광석에 눈을 돌렸다. 붉은 눈의 사람들은 어찌나 영리하던지 미재천에 검은 모래가 쌓여있다는 것도 알고 있었고 비사랑으로 오르는 길 입구에 검은 돌로 이루어진 산이 있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흰구름 마을사람들은 그것들을 그냥 그것으로 보았지만 붉은 눈의 사람들은 철광석과 검은 모래와 검은 돌을 섞어서 돈으로 연결 지었다. 약한 점질을 가진 검은 모래로는 거푸집을 만들었고 철광석과 검은 돌을 녹여서는 주철을 만들었다. 주철을 녹여서는 가마솥을 만들었다. 가마솥공장은 검은 모래가 쌓이는 평장마을 끝에 지어졌다. 검은 모래는 큰비가 내리면 쌓이고 또 쌓였다. 붉은 눈의 사람들은 철광석은 앞산에서 검은 돌은 뒷산에서 가져와 검은 모래언덕에 모았다. 미재천이 만들어준 검은 모래는 적당히 찰지고 고와서 거푸집을 만들기에 적당했고 검은 모래로 만들어낸 가마솥은 결이 곱고 윤기가 흘렀다. 검은 돌과 만난 철광석은 낮은 온도에서도 잘 녹아 물처럼 흐르다가 굳으면 무지하게 단단한 무쇠가 되었다. 결이 곱고 윤기가 흐르는 검은 모래 가마솥은 입소문을 타고 불티나게 팔려나갔다. 가마솥공장 굴뚝에 연기는 밤낮으로 일 년 내 멈추지 않고 피어올랐다. 검은 모래가 모이는 천변 가마솥공장은 자기 자리를 잘 찾아 들어섰다. 가마솥을 만드는 사람들은 맑은 눈의 사람들이지만 돈을 가져가는 것은 붉은 눈의 사람들이었다. 굶어 죽지 않을 만큼의 품삯을 받으면서도 맑은 눈의 사람들은 군소리 없이 일을 해야 했다. 붉은 눈의 사람들 앞에서는 기침만 크게 해도 어디론가 끌려가 모진 꼴을 당하거나 돌아오지 못하는 경우까지 있었다. 그렇게 숨죽이며 지내는 시간이 몇 년 흐르던 어느 날 갑자기 가마솥공장은 힘들게 일만 하던 사람들의 것이 되었다. 광산도 그렇게 되었고 지서를 지키던 순사들도 싹 사라졌다. 할아버지께서 신광재를 넘어 광야로 떠나신지 꼭 7년만의 일이었다. 할아버지께서는 오늘 일이 벌어지리라는 것을 알고 계셨을 것이다. 할아버지께서는 오늘을 만들기 위해 허리까지 차오르는 눈밭을 헤치고 길 없는 길을 걸어 광야로 가셨다. 붉은 눈의 무리들이 떠나고 머지않아 숲 속에 동물들이 돌아왔다. 산에서는 늑대 울음소리가 들렸고 나무를 하러 숲에 들어갔던 나무꾼들은 산의 주인을 만났다는 이야기를 하고 다녔다. 할아버지께서 만들어 놓은 방죽에는 사슴이 물을 마시러 내려왔고 어미여우가 새끼들을 거느리고 닭장 주변을 어슬렁거렸다. 오랜만에 보는 귀여운 여우를 쫓아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붉은 눈의 사람들이 떠나고 산골마을에 조화와 균형은 빠르게 돌아왔다. 임포수 아저씨와 할아버지께서는 아직 할 일이 남았는지 돌아오지 않으셨다. 봄이 오고 다시 겨울이 와도 임포수 아저씨와 할아버지는 소식이 없었고 매년 겨울이면 집으로 날아들던 매들도 돌아오지 않았다. 할아버지께서 뿌려놓은 씨앗 덕분에 마을은 평화로웠다. 일곱 개의 방죽에는 언제나 물이 넘실거렸고 물풀과 우렁이와 물고기들과 오리들이 어울려 살아갔다. 집집마다 메어 있는 소들은 송아지를 거느렸고 봄이 오면 온 동네가 소 울음소리로 정겨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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