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이 가는 길

사람의 기억

한국전쟁이 발발하고 임포수와 할아버지가 돌아왔다.

솔바위 2023. 12. 8. 1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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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러던 어느 날 전쟁이 났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전쟁이 일어났다고는 하지만 산골마을에는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아침에 눈을 뜨면 밭을 갈러 나가고 저녁이 되면 괭이를 메고 집으로 돌아오는 평화로운 일상은 계속되었다. 국군이 인민군에게 밀려 부산까지 내려갔다는 소식이 들렸고 미국이라는 나라가 전쟁에 개입해서 압록강까지 밀고 올라갔다는 소식이 들렸다. 다시 중국군이 들어와 서울을 빼앗겼다는 소식이 들렸고 소련군까지 끼어들어 전쟁은 중국과 러시아와 미국이 하는 전쟁이 되었고 국군은 총알받이로 쓰인다는 소문이 돌았다. 아들을 외국 군인들이 벌이는 전쟁에 희생양으로 보내기 싫었던 아버지는 갓 열아홉 살이 된 나를 외할아버지 동네로 장가를 보냈다. 아버지께서는 나에게 처가에 가서 일 년 정도 일을 해주고 돌아오라 하셨다. 내가 혼인을 했다는 것을 사람들에게 널리 보이려 하심을 알고 있는 나는 군소리 없이 아버지 말씀을 따랐다. 그렇게 또 일 년이 흐르고 겨울이 찾아오고 집으로 돌아와 보니 매가 돌아와 있었다. 아버지께서는 돌아온 매가 너무 고맙고 신기해 정성을 다해 돌보고 계셨다. 전쟁이 끝날 것 같다는 소식이 들렸지만 평화로운 산골마을에는 이제야 전쟁이 시작되었다. 토벌대라는 사람들이 들어와 골짜기 구석구석을 들쑤시고 다녔다. 언제부터였는지도 모를 옛날부터 골짜기에 숨어 살던 사람들이 들녘으로 쫓겨 내려왔다. 토벌대는 산골 오두막에 불을 지르고 마을의 흔적을 지워버리려 했다. 우물을 메워버리고 추수를 앞둔 콩밭과 논에 불을 놓았다. 산에 숨어있는 인민군을 소탕한다며 비행기가 날아와 폭탄을 떨어뜨렸다. 몇 년 전에 사라진 붉은 눈의 사람들과 다를 바가 없는 사람들이었다. 집을 잃은 사람들은 들녘 사람들의 헛간에 몸을 맡겼다. 아이들과 여자들은 우리 집 사랑방과 도르메방앗간과 제각과 서당에서 비와 눈과 추위를 피했다.

  비행기는 폭탄을 떨구어 산을 망쳐놓았고 괴물처럼 생긴 탱크는 논과 밭을 망치고 탱크가 지나는 길에 걸리적거리는 것들은 모조리 짓밟고 지나갔다. 좁은 골목을 지날 때는 양쪽 집 담장을 무너뜨리며 지나갔다. 괜한 죽임을 당할까봐 산에는 들어갈 엄두를 내지 못했고 탱크소리가 나거나 육중한 트럭 엔진소리가 나면 사람들은 몸을 피해야 했다. 토벌대가 그렇게 요란을 떨어도 인민군이라는 사람들은 단 한 명도 보이지 않았다. 인민군을 한 명도 잡지 못한 토벌대는 동네 사람들을 운동장에 모이게 했다. 마을사람들에 숨어 있을지도 모르는 인민군을 색출한다는 명목으로 사람들을 모아놓고는 붉은 눈을 가진 사람들과 같은 방법으로 사람들에게 모욕을 주고 겁을 주었다. 겁먹은 사람들에게 낯선 사람이 나타나면 바로 신고 할 것을 강요했다. 무례한 자들에게 항의하는 사람들은 개머리판에 맞아 머리에 피를 흘리며 쓰러지고 골병이 들도록 얻어맞았다. 토벌대는 항의하는 사람은 매를 맞을 것이고 신고하는 사람에게는 포상금을 주겠다고 했다. 그날 밤 임포수와 할아버지께서 돌아왔다. 임포수는 커다란 어깨로 할아버지를 부축하고는 대숲을 헤치고 안채 부엌으로 조용히 들어왔다. 할아버지 옆구리에서는 피가 흐르고 있었다. 아버지는 조용히 나귀를 타고 나가 믿을만한 의원을 불러왔다. 아무리 조용조용 임포수와 할아버지를 맞이하기는 했지만 이상한 기운을 식솔들이 모를 리 없었다. 식솔들에게는 단단히 입단속을 시켰고 낯선 사람이 아닌 식구가 돌아왔으니 토벌대에게는 신고를 하지 않아도 되었다. 그렇다고 할아버지를 계속 모실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임포수야 새로 들어온 일꾼으로 머물면 되겠지만 할아버지는 너무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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