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이 가는 길

사람의 기억

검은독수리와 만주로 떠나는 할아버지

솔바위 2023. 12. 6. 14: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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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버지는 오래 전부터 젊은 할아버지께서 큰일을 하러 떠나시리라는 것을 어렴풋이 느끼고 있었다. 아직 어린 아버지에게 매사냥을 가르치실 때도 그랬고 이유야 그럴 듯 했지만 혼례를 서두르실 때도 그랬다. 매일같이 서당에 들러 선생님과 바둑을 두고 중국어와 러시아어를 배울 때도 그랬고 임포수를 피신시키고 임포수 식솔들을 거둬들일 때도 그랬다. 아버지는 임포수댁을 시켜 그동안 모아놓은 토끼가죽으로 두툼한 조끼와 모자를 만들게 했다. 두엄자리에 묻어두었던 사금을 꺼내 작은 주머니 여러 개에 나누어 담았다. 티끌 하나도 남기지 않고 모조리 담았다. 나귀에게는 물과 먹이를 충분히 먹이고 먼 길 떠날 채비를 하게 했다. 눈이 내렸다. 세상의 모든 길들은 지워졌다. 많은 눈이 내렸고 잠시 눈은 그쳤지만 하늘은 언제라도 눈을 쏟아 부을 준비가 되어있었다. 겨울하늘이 이렇게 무거운 것은 비밀스러운 무언가를 감추려는 것이다. 할아버지께서는 평소 사냥 나갈 때 입던 옷에 토끼털 조끼를 껴입으시고 증조할아버지께서 남겨주신 헤어질 대로 헤어진 누비옷을 걸치셨다. 할아버지께서는 조용히 길을 나서려 하셨지만 조금은 이상한 할아버지의 행동에 식솔들은 모두 나와서 길 떠나는 할아버지를 배웅했다. 하늘이 무거운 날에는 매사냥을 나가지 않는다는 금기는 동네 사람들 모두가 아는 일이지만 오늘 할아버지는 그 금기를 깨고 사냥을 나가신다. 나귀 안장에는 검은독수리가 할아버지 어깨에는 매가 앉았다. 지워진 길, 길 없는 길을 나서는 할아버지를 걱정스러운 눈으로 바라보는 식솔들에게 아무런 인사도 없이 할아버지는 길을 나선다. 나와 아버지와 임포수댁은 긴 기다림을 준비할 뿐 걱정은 없었고 할아버지의 여행길이 그저 아름답기를 바랐다.

  할아버지께서 길을 떠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매가 꿩을 움켜쥐고 돌아왔다. 아버지께서는 그냥 일상처럼 매사냥을 나가신 것이다. 매는 아직 고향으로 돌아갈 때가 되지 않았다. 매는 철을 알고 있었고 그 어느 바람에도 흔들리지 않았다. 매는 바람을 타고 날았지 바람을 거스르려 하지 않았다. 매는 산속에 널려 있는 호랑이고기와 늑대고기에는 눈길도 주지 않았다. 먹을 것과 먹지 말아야할 것과 받을 것과 받지 말아야할 것을 잘 알았고 따라야할 사람과 따르지 말아야할 사람도 잘 알았다. 매는 모든 것을 보고 있었지만 분노하거나 슬퍼하지는 않았다. 일어나야할 일들은 일어나기 마련이고 모든 것들은 제자리를 찾아가리라는 것을 매는 알고 있었다. 매는 할아버지를 멀리까지 배웅했다. 제자리를 찾아가는 친구를 높은 하늘에서 바라보고 또 바라보았다. 매가 돌아오고 다시 무거운 눈이 내렸다. 나뭇가지들은 눈의 무게를 못 이기고 뚝뚝 부러졌다. 세상의 모든 길은 지워지고 길 떠난 할아버지의 흔적은 어디에도 남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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