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이 가는 길

사람의 기억

우리는 만나야한다.

솔바위 2023. 12. 11. 14: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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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심한 세월은 흐르고 또 흘러갔다. 정부에서 주선한 남북 이산가족 상봉이 몇 차례 이루어졌지만 아버지와 아들을 만날 수는 없었다. 매들은 국경을 지우며 가을이 깊어지면 돌아오고 봄이 찾아오면 북으로 돌아가기를 반복했다. 새로운 기계시설을 갖춘 방앗간이 늘어나면서 도르메물레방앗간도 과거로 사라졌다. 처남 송훈이는 방앗간을 그만두자 시간이 많이 남는다며 매사냥을 자주 나갔다. 열심히 하는 만큼 재미도 지고 백운에 매사냥 수준이 높다는 소문이 퍼지자 여기저기서 매사냥을 배우려는 사람들이 찾아왔다. 우리는 예전부터 하던 놀이이고 좋아서 하는 일이었지만 민중생활사 연구소라는 곳에서 백운의 매사냥을 연구하겠다며 찾아왔다. 연구원들은 우리가 알지 못하는 매사냥의 역사까지 알아내 두터운 책을 만들었다.

  계절은 돌고 돌아 매들이 다시 북으로 돌아가야만 하는 계절이 돌아왔다. 이번에 돌아가는 매는 시치미를 떼고 그 자리에 작은 송신기를 달아 돌려보낸다. 연구원들은 북으로 돌아가는 매가 어디에서 여름을 나고 번식을 하고 백운으로 돌아오는지를 알고 싶어 했다. 아버지께서 보내신 매는 개마고원에 살고 있던 매라 하셨으니 백운으로 돌아오는 매 또한 그러하리라. 처남의 매에는 송신기를 달고 내 매는 시치미를 떼지 않았다. 혹여나 이 매들이 개마고원으로 날아간다면 아버지께서는 내가 만든 시치미를 알아보시리라.

  여름이 지날 무렵 연구소에서 연락이 왔다. 예상대로 백운으로 날아오는 매들은 개마고원에 서식하는 매라는 것과 누구인지는 알 수 없지만 매에 달아 두었던 송신기를 이용해 모르스부호로 메시지를 보내왔다는 것이다. 송신기의 기능이 거의 다해 짧은 메시지였지만 정확하게 '잘 살고 있다. 가을에 매를 돌려보내마. 만나자.'였다.

  가을도 저물어 찬바람이 불어올 즈음 개마고원에서 매가 돌아왔다. 남쪽으로 흐르는 차가운 바람을 타고 국경을 지우며 아버지와 아들의 시치미를 단 매들은 곧장 백운에 있는 자신의 집으로 날아들었다. 시치미에는 '아들 생일 러시아 알혼섬'이라는 글씨가 선명하게 쓰여 있었다. 매가 돌아온 날 아버지의 연세는 109세였다. 아버지는 다시 만나자는 약속을 지키기 위해 우렁우렁한 당신을 삶을 개마고원에서 이어가고 계셨다. 아버지께서 떠나시던 날처럼 이른 첫눈이 쏟아진다. 길을 지우고 국경을 지워 눈으로 이어진 길을 따라 만나야 할 사람들을 만나게 하려는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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