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르메물레방앗간은 시대를 뛰어넘는 이상한 공간이었다. 일제강점기 착취의 칼날이 부엌에있는 놋그릇마저도 빼앗아가던 시절과 한국전쟁의 참혹한 시대를 거치면서도 현명한 지역 어르신 덕에 산골의 삶이 피폐해지지는 않았다. 백운면에는 도르메방앗간과 매사냥이라는 아름다운 문화유산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도르메방앗간에서는 나락을 쌀로 만들고 지난한 삶을 살아가던 사람들에게도 새로운 인생을 시작할 수 있는 희망을 주는 공간이었다. 도르메방앗간에는 고정으로 일하는 젊은이들이 다섯 명 이상이 있었다. 일꾼들은 주거와 음식을 제공받고 임금은 사설은행인 전씨집안의 곡간에 쌓였다. 일꾼들이 나이가 차고 독립할 수 있는 능력이 생기면 방앗간 어르신은 일꾼에게 목돈은 쥐여 주고 결혼을 알선해서 인근 마을이나 일자리가 있는 지역에 자리를 잡을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그러고 나면 새로운 어린 일꾼이 빈자리를 채웠다.
어리거나 젊은 일꾼들이 희망을 품고 일을 하는 방앗간은 늘 신명나는 공간이었다. 마을사람들이 곡식을 가지고 와서 순서를 기다리는 동안 방앗간 어르신은 새참도 내어주고 점심도 함께 먹으면서 여러 동네 소식들을 귀담아 들었다. 방앗간 한쪽에 마련해 놓은 널찍한 공간은 마을사람들의 사랑방이면서 피서지이기도 하고 삶의 고충을 해결하는 공간이기도 했다. 어르신 귀에 들어간 이야기들은 생각하고 고민할 틈도 없이 행동으로 옮겨졌다.
처자식을 두고 만주로 떠난 가장의 빈자리에는 쥐도 새도 모르게 쌀가마를 가져다 두었다. 지독한 가난이 한 가정을 잡아먹으려 들 때에는 어미를 불러 방앗간 청소를 시켰다. 일꾼들에게는 나락이 들어가 돌고 돌다가 쌀이 나오는 기계 곳곳에 쌀 부스러기와 좁쌀과 온전한 쌀을 눈치 못 채게 남기라고 조용히 일러두었다. 방앗간 청소일은 한 가정이 건강을 회복하고 삶의 의지를 키울 때까지 지속되었다.
가난한 사람들의 자존심을 지켜주려는 주인어르신의 마음을 알고 있는 일꾼들은 고마운 마음으로 더 행복하게 더 열심히 일을 했다. 방앗간 사용료는 공정하지 않았다. 나락이 방앗간에 들어가 쌀로 나오면 그 일부를 비용으로 받았는데 방앗간 기둥에는 버젓이 사용료가 적혀있기는 했지만 정작 계산을 할 때는 주인장 마음대로 정해졌다. 자기 땅을 가지고 농사를 많이 짓는 사람에게는 정해진 비용을 정확하게 받았지만 소작을 짓거나 비탈 밭이나 다랑이 논에서 힘들게 농사를 짓는 사람에게는 절반도 안 되는 비용을 받았다.
방앗간 사용료를 받을 때는 일꾼들과 방앗간 어르신의 손발이 척척 맞아 눈치를 채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살림이 지독하게 어려운 사람들의 쌀부대에는 한 되 정도의 쌀이 더 들어가기도 했다. 방앗간 일감과 농사일이 줄어드는 한여름에도 도르메방앗간에는 사람들이 끊이지 않았다. 방앗간 앞을 흐르는 강에는 떵아사리, 꺽지, 동사리, 피리, 산메기 등 맛좋은 물고기들이 풍부했다. 낮부터 모여든 사람들은 물고기를 잡아 안주를 마련하고 방앗간 어르신을 기다렸다. 일을 마치고 방앗간 사랑방으로 출근하는 어르신 뒤에는 주조장 일꾼이 막걸리항아리를 지게에 지고 따라왔다.
밤에 들어야할 이야기들은 천렵으로 마련한 안주와 막걸리와 모깃불이 어우러질 때 조용히 흘러나왔다. 조용히 흘러나온 이야기는 조용히 처리되어 다음날이면 방앗간 어르신 말고는 기억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도르메방앗간 사랑방 옆에는 나귀 세 마리가 살고 있었다. 나귀들은 동네 사람들이 막걸리를 마시며 하는 이야기들을 듣고 울다가 웃다가 했지만 사람들은 나귀들이 왜 그러는지 알지 못했다. 나귀와 아버지와 나는 어제 이야기를 기억했고 사람들은 기억을 지웠다. 아버지의 아버지로부터 이어진 놀이문화를 지금의 방앗간 어르신은 하나도 잊지 않고, 버리지도 아니하고 마을사람들의 형편에 맞게 이어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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