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터 건물에서 시작해서 초가지붕으로 골짜기 너와지붕까지 모든 지붕들이 갑자기 회색으로 덥혔고 먼지가 풀풀 날리던 신작로에 아스팔트가 깔리고 하면서 백운 장터는 사람들로 북새통이 되었지. 초등학교도 중학교도 학생들이 너무 많아서 운동장이 작아보였을 정도로 말이야.
학생이 많은 마령면에는 고등학교가 있었는데 백운에는 없어서 우리 아이들이 마령으로 또는 진안읍으로 어렵게 고등학교를 다니던 시절이었어. 지역 유지 어르신들이 모여 백운에도 고등학교를 세우자고 의견을 모으고 있었지. 학교가 문을 열기까지는 몇 년이 걸리잖아? 그 몇 년 사이에 백운이 또 확 바뀌었지.
먼저 가마솥을 만들던 공장이 갑자기 문을 닫았고 사기그릇 공장도 쪼그라들더니 문을 닫았고 기와공장도 일꾼들이 하나 둘 떠나고 가마에 연기가 그치더니 빈 들이 되어버렸지. 금광에서도 더 이상 금이 나지 않는다는 소문이 돌기 시작하더니 그 많던 일꾼들이 갑자기 떠나버렸지. 소작농으로 살아가던 사람들은 쌀값이 떨어져서 더 이상 농사를 지어서는 먹고 살 길이 막막해졌지.
일자리가 없어진 사람들이 떠나더니 우리들 동생들이 먹고 살 길을 찾아서 자식들에게 좀 더 나은 교육을 시키겠다며 도시로 떠났어. 결국 시골에는 장남들만 남았어. 큰아들을 따라 도시로 나가셨던 아버지 친구 분들 중에는 다시 고향집으로 돌아오시는 분들이 많았지. 그렇게 대략 10년 사이에 엄청난 변화가 일어났고 백운에 고등학교를 세우겠다는 계획은 없어지고 오히려 몇몇 초등학교와 분교들이 문을 닫았어. 또 얼마 지나지 않아 백운초동학교 하나만 남고 다 문을 닫았지.
우리 친구들의 일상도 많이 바뀌었지. 지금은 달라졌지만 우리 세대는 장남이 부모님 재산을 상속받고 집안을 책임지는 시절이었어. 그래서 시골의 장남들은 고향을 떠나지 못하고 여기에 살고 있지. 우리 친구들이 다들 그래. 시골에 젊은이들이 줄어드니까 겨울에 하던 놀이문화도 확 바뀌었어. 다른 지역은 잘 모르겠지만 여기 백운에서는 겨울이 오면 젊은이들이 모여 매사냥을 하면서 놀았거든.
매사냥은 매를 이용해서 꿩이나 토끼를 잡는 사냥법인데 혼자 할 수 있는 놀이가 아니야. 맘이 맞는 친구들이 모여서 꿩을 쫓고 토끼를 몰고 하면 매주가 산등성이에서 매를 날려 사냥을 시작하면 산 아래에서 매와 사냥감을 관찰하던 친구들이 매와 사냥감이 있는 곳으로 달려가지.
그렇게 잡은 꿩은 매주인 봉받이 집으로 가서 집안 어르신 밥상에 올리고 사냥을 같이 했던 동네 젊은이들은 닭을 삶고 돼지고기를 지져서 양조장에서 받아온 막걸리로 포식을 했지. 그리 넉넉하지 않은 살림을 살던 시절에 매사냥을 나가는 날을 동네잔치 날이었지.
양조장을 운영하던 친구가 갑자기 돌아가고 매사냥을 전수받은 그 집안 동생네도 형편이 시들해지면서 매사냥도 함께하는 횟수가 줄어들었어. 몇 해 지나지 않아 양조장은 문을 닫았지. 대신 우리에게는 총이 생겼고 많은 친구들이 몰려다니면서 사냥을 하면 오히려 위험한 물건을 가지고 겨울철 사냥을 시작했어.
놀이삼아 하는 매사냥이 사라지고 일 년에 한 번 매사냥 시연회를 하게 되니까 우리 친구들이 낄 자리가 없었지. 아니! 자리를 마련해줬어도 들판을 뛰어다니고 눈밭에 발이 푹푹 빠지면서 산을 오르던 기억에 옛날 맛이 안 났어. 사실 더 큰 이유는 매사냥을 함께 했던 동네 형, 동생들이 없어서 어색했지. 총을 가지고는 둘이서 사냥을 다녔어.
사냥으로 잡은 짐승은 삼산옥으로 가져갔지. 시골에 남은 얼마 안 되는 친구들과 함께 우르르 몰려가서는 누님께 요리를 해달라고 졸랐어. 물론 손질은 우리가 했지. 가끔 큰 짐승을 잡으면 삼산옥에 드나드는 사람들 모두가 고기 맛을 보았지. 삼산옥에서는 정육점도 운영했는데 우리가 잡아온 고기는 팔지 않고 동네 사람들에게 나눠줬어. 일을 마치고 술 한 잔 하러 들른 손님들에게도 안주 값을 받지 않았어.
누님께서 다리가 불편해지시면서 부터는 처음 보는 손님에게도 주방에 가면 뭐가 있으니 좀 가져오라 하고 냉장고에 있는 음식도 가져오라 하면서 심부름도 시켰지. 세상에 이런 식당이 또 있을까싶어 소문을 들은 사람들이 일부러 찾아오기도 했지.(어르신들은 매사냥이 총을 가지고 하는 사냥으로 변하는 과정을 이야기하다가 다시 삼산옥 누님이 그리워진 모양이다.)
눈이 내릴 즈음이면 해마다 구역을 나눠서 사냥허가가 떨어져. 그런데 사냥으로 짐승을 잡아도 요리를 해 줄 사람도 없고 같이 즐겁게 먹을 사람도 없어서 재미가 없어. 사냥이라는 것이 나 혼자 즐기려고 하는 놀이가 아니거든, 함께 노력해서 잡고 같이 즐겁게 먹고 나누고 해야 진짜 사냥이지.
가끔 젊어서 고향을 떠난 동생들이 찾아오면 몇 남지 않은 우리 친구들은 얼씨구나 하고는 총을 들고 눈밭으로 뛰어나가지만 몸이 예전 같지 않아서 잘 잡아야 꿩 한두 마리가 고작이야. 그것만으로도 산골의 겨울은 행복으로 넘쳐나지. 사람이 무엇으로 사는가? 행복이란 무엇인가? 누군가 묻는다면 이런 것이 행복이라 말해야겠지.
과거를 회상하면서 '그때가 좋았지'라는 말을 하는 것을 좋아하지는 않지만 가끔은 속으로 '그때가 좋았지'라는 말을 해. 관리를 하지 않아도 비가 새지 않는 슬레이트지붕이 들어오고, 먼지가 풀풀 날리던 달구지 길에 아스팔트가 깔리고, 함부로 써도 깨지지 않는 양은냄비와 그릇이 부엌을 차지해버리고, 매와 함께 사냥을 즐기던 우리가 총으로 쉽게 사냥을 하는 변화들이 우리네 삶을 이렇게 바꾸어놓을 줄은 생각도 못했지.
함부로 해도 깨지지 않는 그릇이 사람과 사람의 관계를 깨뜨리고, 관리를 하지 않아도 비가 새지 않는 슬레이트가 아름다운 공동체문화의 둑에 구멍을 냈지. 먼지도 날리지 않고 빠르게 달릴 수 있는 아스팔트 도로는 마을과 마을을 가깝게 이어주기는커녕 사람들을 도시로 내몰았어. 빠르고 편리한 것들이 잠깐은 삶과 생활을 나아지게 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결국에는 그렇지도 않아. 언제부터 내려온 말씀인지는 모르겠지만 우리 동네 어른들이 한결같이 하시던 말씀이 있어.
"크게 좋은 일이 생겨도 너무 좋아하지 말고, 슬픈 일이 생겨도 깊은 슬픔에 빠지지는 말아라."
이웃에게 좋은 일이 생기면 이웃보다 더 기뻐해주고, 이웃에게 슬픈 일이 생기면 내가 더 슬퍼해줘야겠지만 나에게 기쁜 일이 생기면 그냥 웃고, 나에게 슬픈 일이 생기면 한 번 울고 다시 살아가라는 뜻이지. 백운면이 백운장이 흥청거리던 시절을 호령하던 어르신들은 다 돌아가고, 백운장이 쇠락해가는 모습을 바라보며 살아온 우리 친구들도 많이들 돌아갔지. 하지만 그렇게 슬프지만은 않아. 십여 년 전부터는 고향을 떠났던 동생들이 돌아오기 시작했고, 타지에서도 젊은이들이 많이 들어왔어. 모든 것들은 제자리를 찾아가게 되어 있다. 그렇게 생각하니 맘 편히 살만하네.
'사람의 기억' 카테고리의 다른 글
도르메물레방앗간 이야기 (0) | 2023.11.05 |
---|---|
백운동계곡과 섬진강이 만나다. (0) | 2023.11.05 |
백운약방과 삼산옥 (0) | 2023.11.05 |
사기그릇공장과 초가지붕 (0) | 2023.11.05 |
이야기 넷 백운동계곡에서 1편 (12) | 2023.11.0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