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이 가는 길

사람의 기억

낯선 이들과 낯선 세계

솔바위 2023. 11. 14. 13: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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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집이 지금의 모습을 갖춘 때는 증조할아버지 세대를 거치고 할아버지 대에 와서이다. 증조할아버지께서는 영모정이 완성되는 것을 보셨고 집안은 전성기를 맞이하지만 증조할아버지와 할아버지께서는 천주교박해를 피해 골짜기로 은둔의 삶을 선택한 사람들을 보살피셨고, 동학농민혁명이 실패하고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숨어든 사람들을 거두었다. 증조할아버지께서는 나라가 망하는 꼴을 보고는 비탄에 잡기셨다.

세상이 시끄러워져 산중 마을도 들썩일 무렵부터 겨울을 빼고는 늘 올라가 있던 본채의 들문을 무겁게 내려와 올라가지 않았다. 중년의 증조할아버지와 청년이었던 할아버지는 천주교교인과 동학교인과 자주 왕래하면서 세상소식을 전해 듣고 생각을 나누었다. 신문물을 가지고 들어온 도시 사람들은 깊은 골짜기에 자리를 잡고 나오지 않았다. 가끔 들녘과 골짜기의 경계에 사는 사람들을 통해 소식을 주고받을 뿐 호리병 안 마을에서의 생활에 만족했다. 할아버지께서는 신문물에 해박하고 지식이 출중한 몇 분들은 가문의 먼 친척으로 신분을 속이고 서당의 선생으로 모시거나 결혼을 시켜 마을에 정착하도록 도와주었다.

신지식을 배운 도시사람들이 골짜기로 들어오고 나라가 망하고 증조할아버지께서 돌아가셨다. 새로운 사람들은 골짜기에 들어가 나오지 않았지만 바깥세상 소식은 너무나 빠르게 전해졌다. 바깥세상의 새로운 소식과 신지식인들과의 교류는 할아버지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 동네에 배고픈 사람이 없기를, 아픈 사람이 없기를, 비바람을 막을 집이 없어 걱정하는 사람이 없기를, 마을에 다툼이 생기지 않기를 바라며 살아왔던 할아버지의 세계관에 큰 변화가 생기기 시작했다. 대가족과 큰살림을 물려받은 종손의 방어본능이 강하게 움직였다. 할아버지께서는 증조할아버지와 지금까지 해 오던 일을 더 다그쳐서 마무리 하셨다. 아직 방죽 물을 농사에 이용하지 못하는 논들 위에는 사재를 털어 새로운 방죽을 만들었다. 심한 가뭄이 오면 가끔 생기던 마을 사람들 간의 다툼이 마음에 거슬렸던 할아버지는 마을사람들이 문제를 깨닫고 스스로 해결 할 수 있는 기회를 만들고자 했지만 기다릴 만한 시간적 여유가 없었다. 할아버지의 예상대로 탐욕스러운 침략자들은 아버지가 열 살이 되기도 전에 산골마을까지 쳐들어와 야산에 있는 아름드리 소나무들은 모조리 베어갔다. 심지어는 영모정근처 미재천변에 서있는 소나무와 조상님들의 묘를 지키던 소나무까지 베어갔다. 침략자의 탐욕스러운 눈에는 돈이 되는 것과 돈이 되지 않는 것 두 가지만 눈에 들어왔다. 할아버지께서는 문중 어르신들을 불러 모으셨다. 집안의 모든 문들은 무겁게 내려지고 분기탱천한 어르신들은 화를 토해냈다. 할아버지께서는 모든 어른들의 말씀이 끝날 때까지 기다리셨다. 집안의 종손이라고는 하지만 손이 귀해 문중에서 나이로는 한참 어린 할아버지는 조용하지만 단호하게 말씀하셨다. 앞으로는 더욱 심한 모욕과 수탈이 있겠지만 섣불리 저항하지 말 것과 혼기가 가까운 아들과 딸들은 서둘러 혼인을 올릴 것과 동네 사람들을 잘 살펴 배를 곯는 아이가 단 한 명도 없게 할 것과 곡간에 쌓인 곡식은 어차피 빼앗길 것이니 미리 나누어 버리거나 숨겨둘 것과 곧 사람에 대한 수탈이 이루어질 터이니 어떤 유혹이 있어도 자신의 동네를 떠나지 말라고 당부했다. 다시는 침략자들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회합은 없을 테니 오늘 이야기를 마을사람들에게 전하고 절대 잊지 않기를 신신당부했다. 아버지께서는 할아버지의 그렇게 단호한 모습은 처음이고 마지막이었다고 하셨다. 할아버지께서는 은밀히 비사랑마을과 백운동계곡을 드나드셨고 가끔은 낯선 사람들이 일꾼들과 섞여 마당으로 들어와 할아버지의 일을 도왔다. 굳이 일을 하지 않으셔도 되는 할아버지께서는 낯선 사람들이 집에 들어오면 손수 일을 가르치고 품삯을 챙겨주셨다. 가끔은 행색이 남루한 거지가 집에 찾아와도 할아버지께서 직접 밥상을 마주하고 앉으셨다. 낯선 이들에게 호의를 베푸는 일은 집안의 전통이었지만 그 일을 종손이 직접 하는 것은 드문 일이었다. 하지만 아무도 할아버지의 행동을 이상히 여기지 않았다. 할아버지께서는 당신의 인생에 획을 긋는 아니 가족의 운명에도 영향을 미칠지도 모를 커다란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할아버지의 할아버지 때부터 가꿔오던 뒷산 소나무 숲과 영모정이 있는 미재천을 감싸고 늘어서 있던 아름드리 소나무 숲이 침략자들의 손에 파괴되는 과정을 보고만 있어야 했던 할아버지의 마음속에는 불이 일었고 집에 찾아온 낯선 손님들과 거렁뱅이들이 들려주는 세상이야기는 할아버지의 인생에 큰 그림을 새롭게 그리게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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