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이 가는 길

사람의 기억

할아버지는 태어나면서 부터 할아버지셨다.

솔바위 2023. 11. 24. 1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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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울 매사냥으로 즐거운 잔치를 이어가던 마을에 아버지 혼인날이 다가왔다. 할아버지께서는 전전날부터 잔칫상을 준비하고 손님을 받으라셨다. 손님은 귀천을 가리지 말고 받으라 하셨고 낯선 이들은 할아버지께서 직접 대접하겠다 하셨다. 혼례식은 7일 간 계속 되었다. 각자 일가친척들을 손님으로 받다가도 10리를 걸어 함께 모여 놀다가 다시 흩어지기를 반복했다. 10리를 오가며 벌이는 잔치라니! 옛날에도 후대에도 이런 잔치는 드물었고 드물 일이었다. 사람들은 양쪽 집안 잔치를 번갈아가며 돌다가 어느 순간에는 어느 집이 신랑네고 어느 집이 신부 쪽인지를 잊을 정도로 사람을 대하는 태도가 비슷함에 놀랐다. 양쪽 집안 잔칫상은 누구에게나 공평했다. 일꾼들마저도 손님이면서 주인이었고 면장이 오건 지서장이 오건 누구에게나 거렁뱅이가 받는 잔칫상으로 정성들여 맞이했다. 손님 중에는 누구와도 인연이 없는 사람들도 있었는데 손님맞이로 정신이 없는 와중에도 할아버지와 바둑을 두고 가는, 매와 맺은 인연 같은 사람들도 있었다. 혼례 잔치가 끝나고 할아버지께서는 정든 매와 덕태산 꼭대기에 올라가 시치미와 방울을 떼고 아들의 이름표를 달아 고향으로 돌려보냈다. 매는 어쩌면 할아버지와 함께했던 이곳을 돌아와야 할 고향으로 여길 런지도 모른다. 할아버지께서는 눈을 감고 매가 바라보는 세상을 느끼며 매가 날아가는 방향을 가늠하신다. 매는 방향을 잃지 않는다. 제가 가야 할 길을 잘 알고 있기에 그 곳으로 부는 바람을 타고 날아간다. 역풍을 맞으며 힘겹게 날개 짓을 하지도 않고 가야할 길로 부는 바람을 찾으면 힘을 빼고는 날개를 곧게 편다. 바람에 몸을 맡긴 매는 바람이 되어 날아간다. 가야할 길로 부는 바람을 찾기 까지는 하늘을 솟구쳐 오르고 내려앉으며 여러 바람을 타면서 도전과 실패를 반복하지만 가야할 길만 잃지 않는 다면 반드시 찾을 수 있다. 현명한 매는 가야할 길을 정하면 온 힘을 다 하여 최대한 높이 솟구쳐 올라 하늘 위를 빙빙 돌며 내려오다가 단 한 번의 시도로 그 바람을 찾아낸다. 할아버지는 그런 매가 되어있었고 아버지가 그리 되기를 바라셨다.

할아버지는 태어나면서부터 할아버지셨다. 백발이 성성한 할아버지가 갓 걸음마를 뗀 아기에게 "할아버지 잘 걸으시네요."했다. 할아버지의 이름을 불러주시던 분들은 증조할아버지와 할머니 뿐 이었다. 할아버지는 동네에서 늘 큰삼촌, 큰아버지, 큰할아버지로 불렸다. 할아버지는 돌잔치에서도 큰할아버지 돌잔치를 축하해주시는 진짜 할아버지들에 둘러 싸여 있었고 서당에서 공부를 할 때도 형들에게 큰아버지의 역할을 해야 했다. 할아버지께서는 할아버지의 나이와는 상관없이 큰삼촌이어야 했고 큰아버지가 되었고 큰할아버지로 살아야 했다. 아버지께서 열여덟에 혼례를 올리던 해 할아버지의 나이는 마흔을 넘지 않았다. 땅이 녹고 봄이 왔다. 덕태산 꼭대기에 겨우내 쌓여 있던 눈들도 다 녹아내려 나무뿌리들을 적시며 흘러 백운동계곡으로 미비계곡으로 마치천으로 미재천으로 흘러내렸다. 할아버지께서는 집안 살림을 현명한 며느리와 후덕한 임포수댁에게 맡기고 농사일에 열중하셨다. 일꾼들과 함께 새벽에 일어나 논으로 밭으로 나가 땀을 흘리며 일을 하셨다. 일꾼들에게 일을 시키기보다 일을 배우는 입장이 되어 일을 하셨다. 일꾼들은 할아버지를 어르신이라 불렀지만 사실 일꾼들과 할아버지의 별 차이가 없었고 오히려 나이가 더 많은 이들도 있었다. 할아버지는 오전일과가 끝나면 아이들이 북적거리는 서당으로 가셨다. 아이들과 노는 것을 유독 좋아하시기도 했지만 서당 선생님과 바둑을 두는 것도 할아버지의 즐거움 중에 하나였다. 선생님은 할아버지보다 몇 살이 많았는데 여러 나라를 돌면서 평생 공부만 해오 신 분 이었다. 할아버지께서는 선생님을 어릴 적에 공부를 하러 고향을 떠난 사촌형이라 했지만 할아버지와 닮은 구석은 하나도 없었다. 비쩍 마른 몸에 멀대 같이 큰 키는 우리 집안사람하고는 어울리지 않는다. 할아버지는 선생님에게서 다른 나라 이야기 듣기를 좋아하셨고 중국말과 러시아말을 배우셨다. 일본말은 배우기 싫었어도 일상을 살다보니 저절로 익히고 있었다. 해가 기울면 할아버지는 매방으로 들어가 책을 읽고 아이들 공부를 도와줄 교재를 만드는데 시간을 할애했다. 할아버지의 하루는 가을이 깊어질 때까지 한결같았다. 할아버지의 하루가 그렇게 지나는 동안 탐욕에 눈이 먼 괴물들은 물질을 빼앗아가다가 더 이상 빼앗을 것이 적어지자 사람을 잡아가기 시작했다. 무기를 만들 목적으로 집안에 있는 놋그릇에서 숟가락 젓가락까지 빼앗아가던 놈들이 이제는 사람에게 눈을 돌렸다. 괴물들은 갖은 이유를 만들어 사람들을 끌어갔다. 징병으로 끌고 간 젊은이들은 총알받이로 썼고 징병으로 끌고 간 사람들은 석탄광산과 군수공장에서 짐승처럼 부려먹었다. 위안부로 끌려간 아이 몇은 슬픔과 고통을 못 이겨 돌아온 이가 아무도 없었다. 괴물들의 횡포는 날로 심해졌고 세월은 그렇게 무참히 흘러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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