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의 기억

독립운동자금과 마을을 위해 내놓은 송아지와 당나귀

솔바위 2023. 12. 1. 17: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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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할아버지께서는 7일이 지난 다음 장에 다슬기 한 말을 팔러 나가셨다. 모가지에 끈이 묶인 항아리 두 개에 반말씩 나누어 담았다. 나귀는 다슬기 한 말을 가볍게 등에 메고 콧노래를 부르며 꽃향기 그윽한 오솔길을 걸어간다. 외할아버지는 장터에 도착하자마자 어두운 다갈색 다슬기 한 말을 낯빛이 다슬기보다 더 어두운 다갈색인 일본 순사에게 비싼 값에 팔았다. 도르메방앗간 일꾼들 열 두 명이 일주일간 주운 누런 다슬기는 얼마 만큼인지 아무도 모른다. 방앗간 일꾼들은 외할아버지를 생명의 은인으로 믿고 따랐고 흰구름 마을에서 금은 일본 놈들과 괴물들 말고는 거래가 불가능했다. 금은 일본인이 독점해야하는 물건이었고 조선인이 가지고 있는 것은 범죄에 해당하는 것이었다. 외할아버지는 금을 팔아서 돈을 벌 생각이 애당초 없었다. 일본 순사들 눈치를 보느라 외손자 백일잔치에 금반지는 못 해줄망정 순금 한 말 정도는 줘야겠다는 것이 외할아버지의 생각이었다. 어차피 조선인이 가지고 있는 금은 돌보다 못하고 만약 들키기라도 한다면 큰 화를 면치 못할 것이다. 외할아버지는 바깥세상과 은밀하게 접촉하고 계시는 젊은 할아버지께서 잘 처리하시리라 믿었다. 외할아버지는 노란 다슬기 한 말은 젊은 할아버지께 드리고 웃기게 생긴 나귀새끼 세 마리는 백일 된 강아지에게 주셨다. 우리 할아버지께서는 백일 선물로 동네 사람들에게 암소 여섯 마리와 황소 한 마리를 내놓으셨다. 서당을 열고 10년이 지나는 동안 소는 13마리로 늘었다. 아이들이 매일 뜯어오는 싱싱한 풀은 소들을 건강하게 키웠고 새끼도 잘 낳았고 또 그 송아지들을 아이들이 잘 돌봐주었다. 일 년 농사 중에 가장 힘든 일은 축축한 논을 갈아엎는 일 이었다. 마른 밭이야 괭이로 푹푹 찍어내면 되지만 젖은 논은 삽이 흙에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고 괭이는 젖은 땅이 물어버려 빠지지 않았다. 소가 없는 농부들은 논 한 배미를 갈고 나면 뼈마디가 녹아내릴 지경이었다. 젊은 할아버지께서 마을사람들에게 백일 선물로 소 일곱 마리를 내놓는 데는 조건이 있었다. 조건이라는 것이 매우 간단했다. 조건은 농사일에 소를 부릴 때는 서른일곱 가구가 공동으로 하고 소를 먹이고 키우는 것은 일곱 가구가 한 마리씩 책임을 지고 새끼를 낳으면 송아지를 이웃집에 나눠준다는 약속이었다. 외할아버지께서는 나에게 친구를 선물로 주셨고 할아버지께서는 동네 사람들에게 식구를 선물로 주셨다. 선물은 그렇게 돌고 돌아야 좋은 것이다. 나의 백일은 모두가 행복한 날이었다.

할아버지는 백일잔치가 끝나자 농사일에 더 열중하셨다. 겨울동안 두루마기에 챙이 짧은 털모자를 쓰고 다니시던 할아버지는 일꾼들이 입는 헐렁한 면바지에 소매가 없는 저고리를 걸치고 농사일에 몰두하셨다. 할아버지의 일상은 하루하루가 비슷했다. 새벽에는 논이나 밭으로 나가고 점심에는 서당에 들러 아이들과 놀고 오후에는 톱이나 도끼를 들고 산으로 가셨다. 산에는 서서 죽은 나무들이 간혹 있었고 바람에 쓰러진 나무들은 마을사람들이 산에 나는 먹거리를 채취하는데 방해가 되었다. 할아버지는 나무를 해다가 모아서 사기공장과 도기소에 내다 팔았다. 할아버지께서는 산에 가시는 이유를 여러 가지로 아버지에게 설명하셨지만 그냥 몸을 혹사시키러 산에 가시는 것처럼 보였다. 어느 날 할아버지께서는 산에서 좋은 나무를 발견했다 하시고는 아버지를 데리고 산에 오르셨다. 할아버지는 아버지와 함께 몇 날 며칠 동안 산에서 긴 통나무를 내리는 일을 하셨다. 그리고는 그 나무로 비둘기와 닭을 키우는 우리를 크게 새로 지으셨다. 닭장 지붕이 할아버지께서 기거하시는 오두막보다 높았다. 닭과 비둘기를 키우는 우리는 앞쪽 큰 기둥이 네 개에 뒤쪽으로 작은 기둥 네 개를 세우고 삼면은 병아리도 빠져나가지 못하게 대나무로 촘촘하게 엮었다. 정면에는 문을 달고 어른 키 높이까지는 대나무를 가로 세로로 예쁘게 엮었고 위쪽은 명주실로 짠 그물을 쳐 놓았다. 이제 닭들은 어른 키 높이에서 자고 비둘기들은 천정가까이에 살게 되었다. 비둘기들을 좀 더 자유롭게 키워서 번식력을 높일 생각이라 설명하셨지만 실상은 아들과 땀 흘리는 일을 함께 해보고 싶어서 그러셨다. 그렇게 몸을 혹사시킨 할아버지는 가을이 되자 젊은 일꾼들보다 어깨가 더 벌어졌고 산을 뛰어서 오르고 지게에 나무를 산더미처럼 지고 내려오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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