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매가 돌아왔다.
가을이 깊어지고 매가 돌아왔다. 가을걷이도 끝나고 봄에 태어난 소, 돼지, 염소, 닭, 비둘기들은 정성스런 돌봄 덕분에 수가 많이 늘었다. 지난 봄 가뭄으로 고생을 좀 하기는 했지만 오래전부터 만들어 놓은 방죽 덕분에 어렵지 않게 가뭄을 이겨낼 수 있었다. 땅을 가지고 있지 못했던 사람들이 괭이 한 자루로 개간해놓은 다랑이 논이 늘어 물이 부족한 논들이 생겼다. 할아버지께서는 일꾼들과 추수가 끝난 논들을 둘러보며 방죽을 하나 더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할아버지는 봄부터 가을까지 일을 하면서 일꾼들과 똑 같은 품삯을 당신에게도 적용해 돈을 모아 두었다. 할아버지께서는 아버지를 불러 돈을 내밀면서 방죽을 하나 더 만들라 하셨다. 그리고 농사를 짓기 위해 개간한 땅은 농사를 짓는 농부에게 소유권을 넘겨주라는 말씀도 곁들이셨다. 할아버지는 땅의 가치보다는 땅을 일군 땀의 가치가 훨씬 크다며 그리 하는 것이 당연한 일이라 강조하셨다. 농사가 끝난 논밭 둘러보는 일까지를 마친 할아버지와 아버지는 매사냥을 준비하신다. 광에 넣어두었던 사냥도구들을 마당에 꺼내 놓고 가을 햇살을 보여 준다. 매가 앉아 쉬는 횃대인 매퉁아리를 해에게 보여주고 버렁(매의 날카로운 발톱으로부터 손을 보호하기 위해 만든 목이 긴 가죽장갑)을 말리고 작년에 만든 매방울이 소리를 잘 내는 지 흔들어본다. 소리가 아직 괜찮다. 매방울은 무게는 가볍고 소리는 깊고 멀리 가야한다. 그래서 좋은 매방울 만들기가 힘들다. 무게가 가벼우면 소리도 가벼워져 짧은 소리를 낸다. 매방울의 무게가 무거우면 소리야 묵직하게 멀리 가서 좋지만 매의 움직임에 방해가 된다. 매방울은 오래 되면 소리가 둔탁해지고 고르지 못해 맑은 소리를 내지 않으면 다시 만들어야한다. 무게는 가볍고 소리는 맑고 무거워야한다. 아버지는 매방울을 흔들어 보면서 사람의 마음도 그러해야겠거니 하고 생각한다. 작년에 만들고 흡족해 했던 소리와 다르지 않다. 덕태산에서 날아오른 매가 마을 위를 낮게 맴돈다. 방울소리가 좋기도 하고 혹시나 하는 생각에 방울을 또 흔들어본다. 낮게 떠 있던 매가 광야의 찬 기운을 퍼덕이며 매퉁아리에 내려앉는다. 반가운 마음은 벌써 매의 가슴을 쓰다듬고 있지만 그래서는 아니 된다. 매와의 교감이 끊어진지 세 계절이 흘렀다. 그동안 야생에서의 삶을 어찌 살아왔는지 모른다. 광야의 차가운 하늘을 날아다니며 자유혼을 노래했을 테고 원시림이 시작되는 드높은 나무 위나 바위절벽 벼랑 끝 어디 즈음에 새끼를 낳아 길렀으리라! 반가워도 호들갑스럽지 말아야 하고 그립다 하여도 슬퍼하지는 말아야 한다. 할아버지께서는 닭장에서 비둘기를 잡아오라 하신다. 한 손에는 매가 좋아하는 비둘기를 들고 한 손에는 버렁을 끼고 조심스레 매에게로 다가간다. 매는 비둘기를 받아먹더니 가슴을 부풀리며 내민다. 기분이 좋아졌고 경계를 풀었으니 쓰다듬어도 좋다는 뜻이다. 가슴을 쓰다듬으며 꼬리표를 보니 작년에 왔던 그 매가 확실하다. 올 해는 하늘에서 매가 돌아왔다. 봉받이에게 이런 일은 평생에 한 번 있을까 말까 하는 일이다. 매는 몸집이 많이 커졌고 세로줄무늬 가슴털이 가로무늬 털로 바뀌었다. 매를 받는 과정이 생략되고 매를 훈련시키는 일도 필요 없겠다. 매방에 다시 매를 들이고 교감하는 과정을 거치면 머지않아 매사냥을 나갈 수 있겠다. 그런데 할아버지께서는 매를 한 마리 더 받자 하셨다. 동네 꼬맹이들의 도움을 받으니 매를 받는 데는 며칠이 걸리지 않았다. 매 받기를 도와준 꼬맹이들에게는 닭을 한 마리씩 나눠 줬다. 내년 봄에는 알을 품어 병아리를 깔 수 있는 튼실한 암탉으로 골라서 희망을 나누어주었다. 이번 겨울에 받은 매는 아버지 혼자서 길들이기를 시작했다. 물론 매를 받는 일도 혼자서 해냈다. 사랑방 중에 아궁이의 온기가 약하게 전해지는 중간 방을 매방으로 썼다. 곁에 있는 또 다른 매의 기운을 느껴서인지 새 식구가 된 매는 쉽게 길이 들여졌고 사냥을 나가기까지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매사냥을 핑계 삼아 한겨울 동네잔치를 벌였다. 몇 번의 찬치가 벌어지는 동안 내가 태어났다.
아버지를 닮고 할아버지를 닮은 애기 할아버지가 태어났다. 할아버지는 갓 마흔을 넘겨서야 진짜 할아버지가 되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할아버지의 할아버지가 되었다. 육십을 넘긴 손자가 찾아와서 할아버지의 탄생을 축하해주었고 마흔을 넘긴 조카가 삼촌의 태어남을 축복해주었다. 아직 젊은 할아버지도 아직은 어린 아버지도 깜짝 놀라셨다. 물론 제일 놀라고 감동하셨던 분은 어머니셨다. 도시에서 공부만 하다가 돌아온 고향에서 어른들의 뜻을 어길 수 없어 마지못해 한 결혼이었지만 어머니는 아들의 탄생으로 인생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했다. 돌이켜 보면 모든 일들이 뜻밖의 원인들로 이루어지는 듯 보이지만 그 뜻밖의 원인이라는 것이 꼭 일어나야만 했던 일이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머니께서 대학을 졸업할 무렵 식민지 지배자들은 식민지에대한 수탈과 폭정을 강화했고 그만큼 저항도 거세졌다. 식민지 지배자들은 대상을 가리지 않고 고문과 약탈을 서슴지 않았고 칼을 차고 다니던 일본인 건달들도 반 합법적으로 조선인들을 약탈해갔다. 일본인 건달들은 눈에 거슬리는 조선인 남자들은 길거리에서 죽였고 건달들의 눈에 들어오는 여자들은 서슴없이 희롱과 추행에 강간까지 일삼았다. 그럴수록 조선인들의 저항도 거세져서 암살과 테러가 가끔 일어났다. 요인에 대한 암살이 한 번 일어나면 조선인들은 100명이 죽고 1000명이 불구가 되었다. 일본인순사들은 아무 연관성이 없는 사람도 잡아다가 고문을 통해 테러범으로 만들어 사형을 시켰다. 인간에 대한 기본적인 예의조차 잃어버린 무지막지한 괴물들이 도시를 활보하고 다녔다. 자신을 보호할 힘이 없는 대학을 나온 처녀가 도시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괴물들의 하수인이 되거나 저항세력이 되어 저들과 싸우는 수 밖에 없었다. 공부를 더 하고 싶었지만 어찌할 수 없는 상황이 되어 고향으로 내려왔지만 고향도 그렇게 안전하지만은 않았다. 누구, 누구가 징병과 징용으로 끌려갔다는 소문이 돌았고 물을 길러 가던 꽃분이가, 밭일을 나갔던 말숙이가 위안부로 끌려갔다는 소문이 돌았고 그들은 그 뒤로 보이지 않았다. 그래도 고향마을에는 서로를 지켜주려는 사람들이 있어 다행이었다. 세상이 좀 잠잠해지면 다시 서울로 올라가 대학원공부를 하려던 어머니에게 큰아버지는 혼례를 올리면 어떻겠냐는 제안을 하셨다. 너무나 뜻밖의 제안이었지만 매사냥 어르신의 큰아들이라면 어린 시절 친하게 지내던 친구의 동생이어서 섬세하고 착한 아이라는 것을 어머니는 알고 있었다. 친구의 동생이자 남편인 아버지는 어머니께 공손했고 젊은 시아버지는 며느리에게 아무런 부담도 주지 않으셨다. 딸 넷에 막내아들을 낳고 돌아가신 시어머니의 빈자리가 서운하기는 했지만 모든 살림에 똑 부러진 임포수댁이 있어 다행이었다. 할아버지는 어머니가 책 읽는 모습을 좋아하셨고 아버지는 어머니가 들려주는 세상이야기가 재미있었다. 내가 태어나자 집안에는 또 다른 생기가 돌았다. 할아버지와 아버지는 더 자주 매사냥을 나가 마을사람들에게 무언가라도 나눌 핑계거리를 자꾸 만들려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