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의 기억

괴물들의 폭정과 그에 맞서는 할아버지의 호연지기

솔바위 2023. 11. 21. 12: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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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아버지께서는 아버지와 함께 매사냥을 하면서 동네 사람들의 속사정을 상세히 설명해주셨다. 사람과 사람이 모여 마을을 이룬다. 사람은 하나의 우주와 같다. 우주가 균형을 이루며 조화롭게 돌아가는 것은 적당한 거리와 적당한 무게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사람도 그러해서 한쪽이 너무 사납고 다른 쪽이 너무 온순하면 사람과 사람사이의 균형은 깨지고 어느 한 쪽으로 흡수되어버린다. 사람은 누구나가 소중한 존재이기에 적당한 경계를 두어 조화와 균형을 이루어야한다. 마을이 모이면 면 단위가 되고 면들이 모이면 군 단위가 되고 군들이 모이면 도가 되고 도가 모이면 나라가 된다. 나라와 나라의 균형이 깨져버린 지금은 인간성마저 무너져버렸다. 힘을 가진 자는 더 큰 힘을 차지하기 위해 약한 자들을 집어삼켜가며 점점 더 무서운 괴물로 변해간다. 많은 돈을 가진 자는 더 많이 가지기 위해 빼앗길 것도 없는 빈자들의 마지막 남은 희망까지도 밟아버리는 악마가 되어간다. 지금이 그러하다. 큰 틀에서의 균형이 깨지고 나니 작은 마을에서도 균형이 깨지고 악마가 나타난다. 가정을 지키는 사람의 역할이 그것이고 마을을 지키는 사람의 역할도 그러하고 나라를 지키는 자의 역할도 같다. 마을을 지키는 사람은 누구도 너무 궁지에 몰려 희망을 잃어버리지 않도록 살펴야 하고 힘을 가지고 부유하게 사는 괴물들을 부러워하다가 괴물들의 하수인인 되지 않도록 경계를 소홀히 해서는 안 된다. 소중한 것을 지키기 위해서는 멀리 보고 자세히 들여다 보아야 한다. 할아버지께서는 멀고도 가까운 이야기를 들려주신 다음부터는 매사냥에 마을사람들을 참여시켰다.

한겨울 추위가 절정에 달했다. 이 추위가 지나면 입춘이 돌아오고 입춘이 지나면 설이 돌아오고 설이 지나면 혼례를 치를 것이다. 할아버지께서는 얼마 남지 않은 겨울을 동네잔치를 치르듯 보내셨다. 동네 사람들과 매사냥을 나가는 날이면 며칠 전부터 돼지를 잡는다는 소문을 내었다. 매사냥을 나가는 날 아침에는 푸줏간 김씨를 불러 돼지를 잡고 임포수댁에게는 특별한 음식을 준비하라 일렀다. 일꾼들은 쇠죽 끓이는 큰 가마솥 하나를 비워두었다. 할아버지는 어린아이의 얼굴을 하고 마을사람들에게 역할을 나눠 주셨다. 열댓 명의 사람들이 작은 능선을 에워싸고 벌판에 늘어섰다. 할아버지는 절정의 추위에도 가벼운 옷을 입고 휘적휘적 산을 오르신다. 능선 꼭대기에 올라 날카로운 매 울음소리로 신호를 보내자 마을사람들은 작대기를 두드리며 능선을 향해 느린 걸음을 옮긴다. 난생 처음 해보는 매사냥에 사람들은 들떠 있다. 아버지는 멀찍이서 할아버지와 마주하고 서 있다. 풀숲에 숨어 있던 꿩들이 인기척에 놀라 날아오른다. 할아버지의 팔뚝에 앉아 있던 매도 날아오른다. 할아버지의 눈도 아버지의 눈도 동시에 빛이 난다. 아버지는 매의 눈으로 보았다. 제일 먼저 날아 오른 꿩의 목을 날카로운 발톱으로 찍어 떨구고는 두 번째 매의 등을 두 발로 찍어 누르며 도약해서 세 번째 꿩을 움켜쥐는 광경을! 아버지는 그동안의 매사냥에서 이런 광경을 본 적이 없다. 꿩 세 마리를 주워 든 아버지는 산등성이에 서 계신 할아버지를 올려다본다. 하얀 옷을 입어 눈 덮인 나무와 구별이 잘 가지 않는 할아버지의 얼굴에는 미소가 번진다. 아버지는 이렇게 먼 거리에서 할아버지의 표정을 읽을 수 있다는 사실이 꿈만 같다. 할아버지의 당부대로 아버지는 멀리서도 자세히 볼 수 있는 매의 눈을 가지게 되었다. 매는 한 번의 비행을 마치고 아버지의 어깨 위에 올라와 할아버지께로 돌아가려 하지 않았다. 보통은 할아버지와 아버지 사이를 서너 번 씩 오고 가며 사냥을 이어가지만 오늘은 꿈쩍을 하지 않는다. 배 밑을 건드려 날아오르라는 신호를 보내도 소용이 없다. 매는 그저 먼 들판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다. 집으로 돌아가 뭔가 중요한 할 일이 있다는 듯 집이 있는 쪽으로 고개를 돌리고는 움직임을 멈추었다. 매의 마음을 읽은 할아버지는 어느새 언덕을 내려와 아버지 곁에 서 계신다. 사냥꾼들을 이끌고 집에 돌아와 마당으로 들어서는 할아버지의 얼굴에는 흐뭇한 미소가 번진다. 일꾼들과 임포수댁은 제 역할을 잘 해놓았다. 마당 곳곳에 모닥불을 피워 놓았고 멍석을 가지런히 깔아놓았고 오가피나무, 옻나무, 칡, 대추, 생강을 넣고 삶은 돼지고기는 잘 익었고 맛있는 냄새는 십리를 갔는지 지서에 있던 순사들까지 모여들었다. 얼마 전까지 정수리에 총을 맞고 죽은 징용담당 장군의 원수를 갚겠다며 온 동네를 들쑤시고 다니던 놈들이다. 할아버지께서는 괴물을 보거든 아무도 다치지 않고 제압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라면 환대도 박대도 하지 말라고 식솔들에게 단단히 일러두셨다. 곧 사돈이 될 방앗간 식구들도 수레에 술독을 싣고 10리 길을 걸어왔다. 방앗간 식구들은 증조할아버지께서 살아계실 때에도 친인척처럼 돈독하게 지냈는데 사돈을 맺는 것은 당연한 결과인지도 모르겠다. 푸짐한 잔칫상에 동네 꼬맹이들도 신이 났다. 모닥불 곁에 동그란 상을 몇 개 펴고 삶은 돼지고기와 막걸리가 돌아간다. 늘 인자하고 진지하고 자신에게 엄격했던 할아버지는 동네 꼬맹이들과 눈높이를 맞추어 놀다가 칼을 들고 가마솥으로 가서는 고기를 썰어 오시기도 하고 일꾼들에게 막걸리 잔을 주기도 받기도 하시며 아무도 아닌 아무나 될 수 있는 한 사람으로 마당을 누비신다. 마을사람들과 식솔들은 그런 할아버지가 편하고 고맙기도 하지만 마음 한 구석에서는 걱정스런 마음이 올라왔다. 하지만 아버지만큼은 걱정이 없었다. 할아버지께서는 멀리서도 자세히 보고 큰 그림을 그리고 있음을 아버지는 알고 있었다. 막걸리 한 독이 비어갈 무렵 마을사람들을 감시하던 순사들은 자취를 감추었다. 별 볼 일 없는 시골 농부들의 놀이판을 더 이상 감시할 필요가 없다고 느꼈을 것이다. 순사들이 돌아가고 할아버지께서는 충분히 먹고 마시며 노시고는 임포수댁에게 일러 오늘 잡은 돼지고기는 집에 한 점도 남기지 말고 사냥과 음식준비에 함께한 사람들에게 공평하게 나눠주기를 부탁하고는 비둘기 한 마리를 들고 매방으로 들어가신다. 남편을 살리기 위해 억지과부를 만들어 주신 할아버지를 하늘처럼 모시는 임포수댁은 고기국물에 국수를 말아 동네 사람들에게 저녁까지 대접하고 남은 음식들은 정갈하게 싸서는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공평하게 나누어 주었다. 명절이 되어도 고기 맛보기가 힘들던 시절에 할아버지께서는 새로운 문화를 만드셨다. 부모를 잘 모시고자 시작했던 집안의 전통이 할아버지 대에 와서는 오래도록 함께 살아가야할 동네 사람들을 모시는 놀이 문화로 바뀌었다. 이런 잔치가 한 번으로 끝난다면 연극에 지나지 않았겠지만 할아버지와 매사냥을 함께한 아버지가 계시고 방앗간 식구들이 있고 사냥을 함께한 마을사람들이 있어 할아버지의 매사냥은 그저 사냥감을 잡는 과정에 멈추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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