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이 없는 집
서당은 누구나 들여다 볼 수 있도록 얕은 돌담이 둘러쳐 있고 대문이 없다. 대신 아버지의 할아버지께서 심어 놓으셨다는 아름드리 은행나무 두 그루가 대문을 대신하고 있다. 은행나무 사이를 지나 서당으로 들어갈 때면 들떠 있던 마음이 가라앉고 배운 것을 되새기며 은행나무를 사이를 지나 집으로 갈 때에는 되새긴 것들이 마음에 스며들었다. 증조할아버지께서 솟을대문이 있어야할 담장 곁에 은행나무 두 그루를 심은 속내가 그러했다.
담장을 높이지 말고 대문을 만들지도 말고 나무그늘에서라도 누구나 서당에서 글 읽는 소리를 들을 수 있도록! 그리고 은행나무 그늘이 내려주는 차분함과 성숙함을 온 몸으로 느끼기를 바라셨다. 서당 기둥의 두께는 한 뼘을 넘지 않았고 동그마니 이고 있는 초가지붕은 가난한 농부의 살림집과 다르지 않았다. 정면 네 칸 측면 세 칸 소박한 서당은 가운데 마루를 두고 방문들은 모두 들어 올릴 수 있게 해서 겨울을 제외하고는 한 공간으로 쓰도록 하였다.
은행잎이 하늘을 노랗게 물들이다 땅으로 내려앉은 골목을 돌아 내려가니 어린 시절 추억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집터가 나온다. 지금은 종중 재각으로 쓰이다 보니 솟을대문이 세워지고 마당이 좁아졌다. 기억을 불러올 필요도 없이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옛 건물들은 솟아나고 사람들이 돌아와 분주하게 움직인다.
집 앞으로는 마치천이 시냇물로 흐르고 뒤로는 대나무 숲이 병풍으로 둘러있다. 마치천 시냇물소리를 등으로 들으며 집을 바라보면 대문 양쪽으로 세 칸 반짜리 사랑채와 외양간이 보인다. 보통의 집들은 사랑채 안에 툇마루가 있기 마련인데 우리 집 사랑채에는 안에는 좀 큰 마루가 밖에는 좁은 마루가 있다. 대문의 지붕은 사랑방과 높이가 같고 대문에 문틀은 있지만 문이 없고 문턱도 없다. 사람들이 하도 많이 드나들어 문과 문턱이 닳아 없어졌는지 처음부터 없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우리 고향집에는 손님이 끊일 날이 없었다.
문이 없는 문을 열고 집으로 들어서니 추수를 끝낸 일꾼들의 움직임이 바쁘다. 외양간 옆 헛간으로 볏단을 옮기는 형들의 발걸음이 바쁘고 나락가마니를 곡간에 들이는 아저씨들의 어깨가 무겁다. 곡간은 외양간 옆 헛간에서 ㄱ자로 꺾여 이어지는데 본체 가까이까지 일곱 칸이 벽으로 나뉘어 나락을 채우고 쌀독을 두기도 하고 콩가마를 쌓게도 했다. 씨앗 보관하는 방은 맨 끝에 본채 가까이에 두었다.
씨앗을 두는 방과 본채를 사이를 돌아 들어가면 어머니와 여동생들과 아주머니들이 기거하는 안채가 나온다. 안채와 본채 사이에는 우물이 있고 우물 주변은 과일나무와 꽃나무가 적당히 어우러져 편안하고 예쁘게 자라고 있다. 안채는 다섯 칸으로 되어 있는데 부엌이 두 번째 칸에 있고 부엌을 중심으로 방과 마루가 있다. 손님이 없는 날에 아버지와 할아버지께서는 부엌 왼 쪽에 있는 방으로 오셔서 진지를 드셨다.
안채를 돌아 뒤 안으로 가면 낮은 축대를 쌓아 장독대를 만들었고 그 뒤로는 대나무 숲이 이어진다. 다시 안채를 돌아 나오면 본채가 보인다. 본채는 아버지와 할아버지께서 손님을 맞으시는 공간으로 다섯 칸 집이지만 양쪽 끝에 아궁이가 있는 방이 있고 가운데 세 칸은 들문을 두어 공간을 나누었다.
들문을 올리면 하나의 공간이 되고 들문을 내리면 닫힌 듯 열린 공간으로 나뉜다. 아버지와 할아버지께서는 열린 공간에서는 마을 회의와 종중회의를 하셨고 멀리서 찾아 온 손님들은 방에서 맞으셨다. 본채 마루에서 바라보면 사랑채 끝에는 외양간이 하나 더 있고 외양간은 헛간으로 이어지고 헛간은 농기구를 보관하는 창고로 이어진다. 창고를 지나 대나무 숲 쪽으로 조금 걸어가면 조용한 골방 한 칸이 있는데 여기는 아버지와 할아버지께서 겨울에 매와 함께 지내는 방이다. 매방을 지나 대숲으로 들어가면 닭과 비둘기를 키우는 사육장과 돼지막이 나오고 그 곁으로 화장실과 두엄자리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