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의 기억

백운 매사냥은 자발적 사회복지 행사였다.

솔바위 2023. 11. 6. 11: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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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사냥에서 초진이는 꿩 세 마리를 잡았다. 어르신의 아버지 때부터 해오던 매사냥이지만 첫 번째 사냥에서 꿩 세 마리를 잡기는 처음이다. 아침에 시작한 매사냥은 점심 무렵이 되면 끝낸다. 도르메방앗간 사랑방에 걸려 있는 커다란 가마솥에는 아침부터 돼지머리와 앞다리 한 쪽과 돼지 한 마리에서 나온 모든 뼈가 삶아지고 있다. 방앗간 앞마당에는 매사냥에 함께한 집 아이들과 음식을 준비해준 아주머니들이 기다리고 있다.

살코기는 정갈하게 정리하고 나눠서 종이에 싸두었다. 매사냥에 함께한 떨이꾼들과 배꾼들에게 고기 한 덩어리씩을 나눠 주기위해 방앗간 어르신은 푸줏간 주인을 불러 돼지 한 마리를 잡게 했다. 매사냥에서 돌아온 사람들은 잔칫상을 받은 기분이다. 돼지머리는 익은 부위부터 칼로 썰어 도마에 올려놓고 먹는다. 굳이 상을 차릴 필요도 없다.

나락가마를 쌓아 놓던 작업대 위에 김치와 새우젓을 내고 도마 위에는 고기를 썰어 놓는다. 오랜만에 고기 맛을 보는 터에 고기는 썰기가 무섭게 사라진다. 양조장에서는 막걸리 한 도가지를 보내왔다. 베푸는 일에 인색한 양반이지만 매사냥을 나가는 날에는 일 년에 한 번 막걸리 한 도가지를 내놓는다. 사람 사는 이야기, 내년 농사 이야기로 꽃을 피우다보면 하루해가 짧다. 고기도 막걸리도 떨어질 즈음에는 하루 종일 잘 우려낸 돼지뼈 국물에 국수를 말아먹는다. 이렇게 국수까지 말아먹고 가마솥을 깨끗이 비우고 맑은 물까지 부어놓아야 매사냥이 끝난다.

매사냥에 함께한 사람들은 종이에 싼 돼지고기를 새끼줄로 묶어 들고는 행복한 발걸음으로 집을 향한다. 잡아온 꿩 중에 두 마리는 매사냥을 전수해주신 노촌리 매형에게 보내고 한 마리는 안주인에게 직접 요리를 부탁한다. 방앗간 어르신은 안주인이 끓여 꿩탕을 상위에 올리고 아들들과 딸들과 둥근 밥상에 둘러앉았다.

바깥일로 바쁜 어르신이 아이들과 밥상머리를 같이 하는 일은 그리 자주 있는 일이 아니지만 아들과 매사냥을 나간 날은 꼭 저녁을 같이 먹는다. 겨울에 잡은 꿩은 살이 적지만 고기에서 향기가 난다. 가을무를 불규칙하게 삐져넣고 끓인 꿩탕은 고기보다는 국물 맛이 일품이다.

밥상머리에서 어르신의 이야기는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힘겹게 살아오진 아버지와 모두가 평등한 세상을 꿈꾸며 살다 가신 할아버지 이야기로 시작해서 착하고 아름답게 살아오신 노촌리 매형이야기로 이어지다가 사람에 대한 예의는 어떠해야 하는 지로 끝이 난다. 사실 방앗간 어르신이 매사냥을 즐겨하는 이유는 멀리 보고 세심하게 살피고 이웃들과 물질을 나누고 정을 나누고자 하는 것임을 아이들은 잘 안다.

방앗간 어르신의 매사냥은 본격적인 농사준비가 시작되는 2월 말까지 계속된다. 늘 음식이 부족하던 시절 어르신의 매사냥은 개인이 벌이는 사회복지사업이었다. 돼지를 잡으면 머리와 내장은 국밥을 끓이고 먹기 좋은 부위는 이웃들과 나누었다. 닭을 여러 마리 잡으면 닭발과 내장으로는 탕을 끓이고 먹기 편한 고기는 매사냥에 참여한 식구들에게 돌렸다.

두부를 몽땅 만들어 이웃과 나누고 냇가에서 바위를 두들겨 잡은 물고기로는 어죽을 끓여 나눠 먹었다. 방앗간 어르신의 삶은 자신을 드러내기 보다는 마을사람들에 녹아 있었다. 어르신은 아버지와 할아버지의 삶을 이어갔고 우리의 삶을 살았다. 할아버지의 유산을 물려받은 아버지, 아버지의 유산을 물려받은 어르신은 재산을 내 것으로 움켜쥐기보다는 우리 것으로 나누는 삶을 귀하게 여겼다.

봄이 온다. 방앗간 사랑방 손님들은 겨울을 겨우살이처럼 나면서 어느새 도르메방앗간 식구가 되었다. 봄이 온다는 것은 새 생명이 움트는 것을 보는 것이다. 아지랑이가 피어나는 들판에는 새 생명들도 아지랑이처럼 솔솔 자라나기 시작했다. 겨우내 사냥을 함께 했던 매에게는 매일 메추라기 세 마리를 먹여 살을 찌웠다.

아무리 흰 구름이 걸쳐가는 백운이라지만 날이 더워지면 매는 살아가기가 힘들어진다. 매가 태어난 고향으로 돌려보낼 때가 가까웠다. 우리 매는 겨우내 사냥을 하면서 아이들과도 동네 사람들과도 많이 친해졌다. 고양이가 그러하듯 아이들이 다가가면 날개를 파닥이며 반기고 손을 내밀면 머리를 들이민다. 떠나보내야 하는데 정이 너무 많이 들었다. 넘지 말아야할 경계를 넘어선 듯해서 걱정이다.

방앗간 식구들이 농사준비를 하는 삼월 한 달 동안 어르신의 아들은 매와 놀면서 살을 찌워 고향으로 돌아갈 채비를 해주었다. 매는 먼 하늘을 날아 몽골 초원 어디, 깊은 숲이 시작되는 높은 나무에 둥지를 틀고 새끼를 낳아 길러야 한다. 그것이 순리라는 것을 할아버지께서 알려주셨고 아버지께서 말씀하셨지만 아들은 매를 떠나보내기가 못내 아쉽다.

아버지께서는 겨우내 매와 함께 살다시피 하셨지만 봄이 오는 길목에 들어서자 정을 떼려는 듯 매가 사는 매방에는 눈길도 주지 않으셨다. 방앗간 식구들이 못자리를 준비하러 논으로 나간 사이 아버지께서는 혼자서 매를 데리고 산으로 가신다. 매를 돌려보낼 때가 되었다. 매방울을 떼고 시치미도 떼고 정도 떼고 꼬리에는 작고 노란 리본을 새로 달았다. 행여나 올 가을에 다시 돌아오면 알아보기 위해서다.

매는 한 해가 지나면 크기도 달라지지만 털도 문양이 바뀌어 알아보기가 힘들다. 방앗간 어르신은 매와 함께 매의 눈으로 새로운 생명을 품기 시작하는 백운의 들판을 바라본다. 어르신은 눈을 지그시 감고 매를 날려 보낸다. 눈빛으로 매와 이어져 있던 교감을 끊고 매의 눈은 매에게 돌려주어야한다. 매는 어르신의 마음을 헤아린 듯 높은 하늘로 솟아올라 바람을 타고 몇 바퀴 돌더니 산 너머로 사라진다. 어르신은 매가 사라진 봉우리 너머를 오래도록 바라보고 있다. 그리운 것들은 다들 저 산 너머에 모여 있을 것이다. 지금은 볼 수 없는 그리운 사람들도 존재를 감추어 돌아가셨을 뿐 언젠가는 고향에 갔다가 돌아오는 매들처럼 우리 곁으로 내려오리라!

겨울에 도르메방앗간 사랑방으로 찾아든 손님들은 봄이 오니 어엿한 일꾼들이 되어 있다. 눈코 뜰 새도 없이 바쁜 농사철이 지나면 어르신은 일거리가 있는 곳으로 손님들을 떠나보낸다. 아버지도 그러하셨고 어르신도 일을 하고자 하는 사람들에게는 일거리를 주고 정당한 대가를 주어 살아갈 힘을 기르도록 도와주셨다. 다행히 백운에는 일을 하고자하는 사람들을 받아줄 넉넉한 일자리가 많았다.

아직 나이가 어린 소년들은 방앗간에서 허드렛일을 시키면서 학교에 다니도록 베려했다. 방앗간에서 성년식을 치르고 장가를 가고 근처 마을이나 도시로 나가 자리를 잡은 사람들은 어르신의 은혜를 잊지 않고 겨울이 되면 매가 돌아오듯 가끔 돌아와 방앗간어르신을 돌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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